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흐름이 묘하다. 한쪽에서는 전기차 보급을 위해 제 살을 깎는 가격 전쟁이 한창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환경 규제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장수 모델들이 퇴장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와중에 하이브리드의 가치를 다시금 꺼내 든 브랜드까지 가세하며, 완성차 업계는 그야말로 ‘전략의 대혼돈’ 시대를 지나고 있다.
기아의 정면돌파, ‘전기차 대중화’를 향한 가격 파괴
한국 시장에서 기아가 보여주는 행보는 공격적이다 못해 필사적이기까지 하다. 테슬라가 연초부터 시작한 무차별 가격 할인에 대응하고, 한국 상륙을 앞둔 BYD 등 중국 브랜드의 공세를 막아내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기아는 최근 준중형 전기 SUV인 EV5 롱레인지와 EV6의 가격을 각각 280만 원, 300만 원씩 낮췄다. 특히 새롭게 투입되는 EV5 스탠다드 모델은 보조금을 더할 경우 실구매가가 3,400만 원대까지 떨어진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제 좀 살만해졌다’는 소리가 나올 법한 지점이다.
기아의 전략은 단순히 차값만 깎는 데 그치지 않는다. EV3 GT를 필두로 한 고성능 라인업을 보강하는 한편, 지갑이 얇은 2030 세대를 겨냥해 0%대 저금리 할부나 잔가 보장형 프로그램을 대폭 늘렸다. 차를 살 때의 초기 비용 부담은 줄이고, 나중에 중고차로 팔 때의 가치까지 회복해주겠다는 계산이다. 여기에 전문 정비 인력을 확충하고 고전압 배터리 수리 거점을 늘리는 등,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게 했던 ‘사후 관리’에 대한 불안감을 지우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결국 가격과 서비스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전기차 대중화의 판을 깔겠다는 심산이다.
규제의 역설, 영국 시장에서 사라지는 피칸토의 비극
하지만 화려한 전기차 축제의 이면에는 씁쓸한 퇴장도 존재한다. 기아의 효자 모델이자 영국의 국민 경차로 통하는 피칸토(국내명 모닝)가 대표적인 사례다. 피칸토는 영국 시장에서 누적 25만 대 이상 팔릴 만큼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2030년을 기점으로 영국 도로에서 신차로 만나기 어려울 전망이다. 수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영국의 ‘ZEV(무공해차) 의무화’라는 규제의 벽에 가로막혔기 때문이다.
영국 규정에 따르면 2030년부터 내연기관 신차 판매가 금지되며, 하이브리드만 허용된다. 2035년에는 오로지 전기차만 팔 수 있다. 폴 필포트 기아 영국법인장은 “2029년 이후로는 피칸토 가솔린 모델을 팔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기아는 피칸토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얹는 대신, 아예 모델을 단종하거나 소형 전기차인 EV1(가칭)으로 대체하는 방향을 고민 중이다. 제조사 입장에서는 빡빡한 전기차 판매 쿼터를 맞추기 위해 수익성이 낮은 경차 대신 스포티지 같은 고부가가치 모델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실속 있는 이동 수단을 원하는 소비자들만 선택지를 잃게 되는 셈이다.
혼다의 유턴, 다시 하이브리드가 중심이다
기아가 전동화에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면, 일본의 혼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경로를 택했다. 혼다는 최근 하이브리드 중심의 전략 수정안을 발표하며 분위기 반전을 꾀하고 있다. 미베 도시히로 혼다 사장은 새로운 하이브리드 세단과 아큐라(Acura) SUV 프로토타입을 공개하며, 2029년까지 글로벌 라인업에 15종의 하이브리드 모델을 추가하겠다고 밝혔다.
혼다의 이런 선택은 전기차로의 완전한 전환 이전에 거쳐야 할 ‘현실적인 징검다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기인한다. 충전 인프라에 대한 스트레스와 주행거리에 민감한 북미와 아시아 시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것이다. 혼다는 단순히 엔진만 바꾸는 게 아니라 새로운 플랫폼과 ADAS(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를 결합해 상품성을 높일 계획이다. 전기차에만 올인하는 것처럼 보였던 과거의 모습에서 탈피해, 소비자들이 당장 지갑을 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를 다시 제공하겠다는 전략이다.
결국 지금의 자동차 시장은 규제가 강제하는 미래와 소비자가 원하는 현재 사이에서 치열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기아처럼 공격적인 물량 공세로 정면 돌파를 선택하든, 혼다처럼 하이브리드로 우회하며 내실을 다지든,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알던 익숙한 자동차들의 시대가 생각보다 빠르게 저물고 있으며,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한 제조사들의 셈법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